[성지순례 37 : 비아돌로로사 9, 10지점] 죄인들을 향한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 몸소 체험

주님, 십자가 지고 가시다 세 번째 넘어지신 제 9지점
병사들에 옷 벗김 당하시며 멸시·조롱 겪으신 10지점
하나님 공의 이루고자 순종하신 예수님 생각에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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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타임스
기사입력 2021-01-04 [14:06]

▲ 주님이 가신 골고다의 길에 십자가를 메고 찬송을 부르며 오르고 있는 고성주 목사와 성태화 목사(오른쪽).     ©

 

주께서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흘리신 그 피로 우리를 살리시려 걸어가신 비아돌로로사, 십자가의 길.

그 엄청난 고통 중에서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고 말씀하신 주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울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길 소망하며 발걸음을 세 번째 쓰러지신 제9지점으로 돌렸다.

 

▲ 제 9지점. 세번째 쓰러지신 곳.     ©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닌 세 번. 이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할 찌 머뭇거려지는 장소인 것 같다. 

주님을 보고 기대를 걸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찌되는가. 더 이상 세 번이나 쓰러지신 주님께 기대나 희망을 걸지 않을 것이 아닌가. 연약한 존재라며.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어 얼굴을 땅에 대고 넘어져 계신 주님. 높고 높은 하늘의 왕권을 가지신 주의 얼굴이 땅에 닿아 있다. 땅은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니는 곳. 온갖 짐승들까지도 배설물을 뿌리는 곳. 침을 뱉고 온갖 쓰레기들을 버리는 곳. 그 곳에 주의 얼굴을 무참하게 내어 던지시니 주님은 정말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절대로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더 잘 치장하여 남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심이기에. 그 누가 보더라도 우러러 볼 수 있게 만들고 싶은 얼굴. 

주님에게는 그런 체면도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제발,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는 마십시오’라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곳이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얼굴을 똑같이 만들어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우리 얼굴을 남 앞에 더 잘 보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많은 이들 앞에서 땅에 얼굴을 대고 넘어지더라도 체면 깎이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이렇게 두렵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신 주님.

주의 그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어,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우리의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를 훌훌 벗어버리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땅에 얼굴을 대고 넘어질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 보는 9주점에서 어느덧 제10지점으로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 제 10지점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장소다.     ©

 

주께서 옷 벗김을 당하시고, 초와 쓸개를 맛보심을 묵상하는 곳이라 여겨진다.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 병사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넘어지신 예수께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이 세상에서는 옷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인데 감히 만왕의 왕의 옷을 벗겼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의 옷을 벗겼다.

하지만 주님은 어찌 그리 가만히 계실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반항도 한 번 하지 않으시고 그런 인격모독의 수치를 당하시고만 계셨을까.

어린아이는 옷을 입지 않아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그 누구라도 벌거벗은 모습을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주님은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런 능력의 힘을 믿거나 말씀을 듣고서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 벗김을 당하신 것이다. 

이런 일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10지점은 다시한번 죄인들을 향한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려 인내하시는 주의 십자가의 길. 우리는 우리의 몸이 부끄럽다. 왠지 모르지만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 몸의 부분 부분들이 다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누가 볼까 봐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늘 몸을 싸고 또 싸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을 ‘어떻게 더 좋게 보이게 할까’고 궁리하며, 좋은 옷으로 치장하고 성형으로 뜯어 고치는 겉치레의 모습에 헛된 시간들을 보내니 말이다. 

주님은 10지점에서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시고 

벌거벗은 채로 서 계시었으니, 이런 멸시와 조롱거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우리는 늘 묵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처럼 그런 모습을 당하여도 피해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장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태초에 주님은 직접 ‘가죽옷을 만들어’(창세기 3:21)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인생들의 수치를 가려 주신 하나님의 자비다.

주님은 10지점에서 인간들이 벗기신 옷으로 우리의 죄악을 가리 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고 하신 말씀을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다. 이런 인생에게 주님은 수치를 무릅쓰고 무화과 나뭇잎이 되어 주신 현장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알몸을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아담과 하와처럼 수치를 알기 때문이다. 곧 죄악 때문이라는 답이다. 이 죄악을 용서하시려 비아돌로로사, 지금 그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신 주님인 것이다.

 

▲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이시돌 은총의 동산에 십자가의 길을 재현한 조각작품 중 ‘주님의 쓰러지심’.     ©

 

주께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안타까움은 인간의 동정심에서 있을 수 있으나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러 아무 말없이 순종하신 것이다. 이 순종으로 우리가 자유 함을 얻은 것이다.

이제는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알몸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앞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두려워하여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죄책에 사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들 앞에서 옷을 벗기심을 당하면서 그 조롱과 멸시함을 마다아니하시고 벗겨지신 성의로 우리의 어물을 가려주시고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으니 그 은총 감사하며 구령의 열정으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망의 발걸음을 옮겼다.

비아돌로로사에서 / 신춘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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