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성지순례15 -유대광야1] 공동체 수도원 ‘코노비움’ 처음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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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타임스
기사입력 2018-09-18 [11:34]

유티미우스, 순례 중 유대 광야서 평생 수도사 결심

수도사들의 경건함 일반 성도들의 영적지도에 큰 영향

 

삭막한 사막의 연속이다.

주님이 유대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빌린다면 광야의 순례는 고난을 넘어 자신과의 싸움의 현장이라 본다.

이번호와 다음호에는 주님의 고난의 현장을 수도사들이 수많은 수도원을 건설하고 고행의 훈련을 해 온 유대 광야를 달려간다. 여기에 이주섭 목사의 설명에 감사를 드린다.

 

먼저 유대 광야에서 평생 수도사로 살기로 한 인물을 소개하며 유대 광야를 더듬어 간다.

 

그 인물중의 하나가 유티미우스(Euthymius).

 

그는 377년 멜리테(Melite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멜리테는 터키의 동쪽, 오늘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의 한 지역이다. 멜리테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피신했던 멜리데 섬(Malta island)과는 다른 곳이다.

 

▲ 여리고로가는 유대광야     © 기독타임스


어린 시절을 교회에서 보낸 유티미우스는 장성하여 멜리테 주변의 수도사들을 책임지는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나이 29살 때,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리고 성지 순례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대 광야에서 평생 수도사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405년 유대 광야의 파란 수도원(Pharan monastery)에 도착한 유티미우스는 광야에서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다. 필자는 2013년 3월 9일 유티미우스에 의해 시작된 유대 광야의 수도원을 찾아갔다.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채리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유티미우스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 유대 광야, 예루살렘에서 마르 사바 수도원으로 향한 길     © 기독타임스


파란 수도원을 떠난 유티미우스는 동료 데옥티스투스(Theoctistus)와 함께 와디 무할릭(Wadi Mukallik/ Nahal Og)의 절벽에 데옥티스투스 수도원을 세웠다.

 

와디 무할릭은 예루살렘과 모압 산지를 연결한 가장 짧은 길이지만 매우 험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와디 무할릭을 벗어나면 쿰란 유적지의 바로 북쪽이다. 유티미우스에 의해 시작된 데옥티스투스 수도원은 유대 광야의 첫 번째 코노비움 수도원이다.

 

코노비움 수도원은 공동체 수도원을 말한다. 이후 데옥티스투스 수도원을 떠난 유티미우스는 홀로 유대 광야로 들어가 경건 생활을 거쳐 다른 코노비움인 카파바리차(Caparbaricha) 수도원을 헤브론 산지에 세웠다.

 

▲ 유티미우스 수도원으로 가는 길     © 기독타임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쇼르 아둠밈(Mishor Adummim)에 라우라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세 번째 수도원은 후에 유티미우스의 이름을 따라 유티미우스 수도원으로 불린다.

 

유티미우스는 채리톤의 라우라 수도원의 특징을 결합한 공동체 수도원인 코노비움 수도원을 유대 광야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유티미우스의 탁월한 지도력에 의해 미쇼르 아둠밈에 있는 그의 라우라와 데옥티스투스 수도원 사이에는 상호 협력이 이루어졌다. 두 수도원은 공동 소유로, 한 사람에 의해 관리되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호스텔도 포함되었다.

 

이런 협력 관계는 다른 수도원의 창시자들인 제라시무스(Gerasimus), 요한 코지바(John of Choziba), 사바스(Sabas)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곧 수도원들 간에 네트워크(network)가 형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의 수도원은 그 지역에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유티미우스의 라우라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 예루살렘-요단강 길에 세워진 고대의 수도원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바닥 모자이크와 건물 잔해들만 남아 있다     © 기독타임스


유티미우스의 초기 수도사들은 거의 모두 해외 출신들이다. 멜리테(Melitene) 출신인 유티미우스, 유티미우스의 초기 동료 세 사람은 갑바도기아 출신, 또 다른 세 사람은 시내 반도의 라이다우(Rhaithou) 출신, 오직 한 사람만이 팔레스틴 출신이었다.

 

스키토폴리스 출신인 시릴에 따르면, 유대 광야의 많은 수도사들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 출신들이다. 여기에는 루기아(Lycia), 갈라디아(Galatia), 길리기아(Cilicia), 아르메니아(Armenia), 구브로(Cyprus), 그리스(Greece), 로마(Italy)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동쪽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대 광야로 왔다. 물론 시릴처럼 팔레스틴 출신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수는 적었다.

 

유티미우스의 활동 시기에 유대 광야의 수도사들은 크게 증가되었다. 유티미우스를 따르는 많은 수도사들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두루 존경을 받았고, 예루살렘 교회를 포함한 여러 지역의 영적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곧 소수의 수도원들 특히 유티미우스의 라우라 수도원에서 팔레스틴의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유대 광야 수도사들의 경건함이 일반 성도들의 영적 지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수도원 영성은 현대 수도원들의 영성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한다. 수도원 운동의 초기에 영적 감화력은 유티미우스의 신학과 관련이 깊다. 유티미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요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칼케돈 신조(creed of Chalcedon)를 적극 지지한 지도자였다. 수도원의 경계를 넘어 폭넓게 존경을 받았던 유티미우스에 의해 유대 광야의 수도원들과 예루살렘 교회 간에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유대 광야의 수도원 건축과 수도원 유지에 필요한 재정 지원도 활발하였다.

 

유티미우스는 47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유티미우스 라우라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티미우스에 대해서는 시릴의 유티미우스 전기를 통해 자세히 알려져 있다. 시릴은 유티미우스를 한 마디로 ‘유대 광야의 수도원을 발전시킨 위대한 선생(the great teacher)’으로 정리하였다.

 

유티미우스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수도사들은 물론, 수도원 주변의 주민들과 인근 유목민들도 포함되었다. 심지어 광야에 거하던 사라센 부족(a Saracen tribe)도 있었다. 유티미우스는 공공 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 피했다.

 

▲ 양을 치는 베드윈 목동이 기도를 하고 있다     ©기독타임스

다른 유대 광야 수도원들의 지도자들(사바스, 데옥티스투스)과는 다르게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능한 먼 곳에서 지냈다. 그는 종교적인 대외 활동도 최소화하였다. 451년 유티미우스는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케돈 신조를 적극 지지하였다.

 

칼케돈 신조 이후 그는 자신의 수도원을 떠나 광야 깊숙이 들어가 홀로 거했다. 그는 가능한 교회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시릴은 유티미우스를 밝은 성격의 사람이라고도 기록했다. 키는 작았고, 둥근 얼굴에 매서운 눈매(sharp eye), 넘실대는 하얀 수염을 가진 인물로 그를 묘사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열정으로 유대 광야에서 한 평생을 보낸 유티미우스는473년1월20일 운명하였다. 그리고 유티미우스는 마지막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 마르사바 수도원     © 기독타임스


유티미우스에 의해 유대 광야의 수도원들이 발전될 때에, 요단강 근처, 요단 평야의 수도원들은 제라시무스(Gerasimus)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제라시무스는 루기아(Lycia) 출신이다. 루기아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배의 행선지 중의 한 지역이다(행27:5). 루기아에서 이미 수도사 생활을 경험한 제라시무스는 요단 평야의 수도원 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호에 계속>

유대광야에서 / 이주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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