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성지순례16 -유대광야2] 로마 박해 시대를 견뎌낸 순례자들의 역사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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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타임스
기사입력 2018-10-05 [17:49]

사바스·데오도시우스, 유대 광야 수도원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로 선구자 역할 감당
614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14년간 암흑기 거쳐 19세기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회복

 

제라시무스(Gerasimus)는 요단 평야에 라우라 형태의 새로운 수도원을 창시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라우라 수도원은 중앙의 코노비움을 중심으로 둘레에 수도사들이 기거하는 많은 동굴로 이루어진 수도원을 가리킨다.

 

곧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 생활을 결합한 수도원이다. 제라시무스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창고, 식당, 주방과 그리고 수도원장, 집사, 수도사들, 수도원 운영자들의 숙소들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수도원은 요단 평야의 칼라몬 라우라(laura of Calamon)와 코지바 수도원(monastery of Choziba/ 성 조지 수도원)의 모델이 되었다.

 

유대 광야의 유티미우스(Euthymius)와 요단 평야의 제라시무스(Gerasimus)의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바스(Sabas)와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두 사람이 소아시아로부터 유대 광야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유티미우스의 제자들로부터 경건 훈련을 받았다. 데오도시우스는 데옥티스투스 수도원의 초기 멤버인 마리누스(Marinus)와 루카스(Lucas)로부터, 그리고 사바스는 데옥티스투스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데오도시우스와 사바스는 유대 광야 수도원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5세기 초반에 수도원장(archimandrite)의 영향력은 예루살렘 교회에도 미쳤다. 수도원장은 수도사로서, 유대 광야의 수도원과 도시 수도원(urban monastery)의 수장을 맡기도 했다. 그들은 수도원들의 경제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을 책임졌지만 수도원들의 내부 문제에까지 관여하지는 않았다. 일종의 광야 수도원과 도시 교회 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 마르 사바 수도원     © 기독타임스



494년 데오도시우스와 사바스는 이런 네트워크의 책임자들로 임명되었다. 데오도시우스는 예루살렘 지역의 코노비아를 맡았고, 사바스는 유대 광야의 라우라와 그곳의 수도사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광야의 수도사 출신이 이런 책임을 맡게 된 것은 처음이다. 이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광야의 수도원과 도시 교회 간의 관계는 밀접하게 발전하였다.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423년 갑바도기아(Cappadocia)의 수도인 가이사랴(Caesarea)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오늘날 중앙 아나톨리아의 케이서리(Kayseri)이다. 데오도시우스는 약451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지 순례를 마친 후 유대 광야로 갔다. 데오도시우스는 수도원의 순수한 코노비아적 정신(pure coenobitic concept)을 강조하였다. 그는479년, 예루살렘의 남쪽, 베들레헴의 동쪽에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유대 광야에서 가장 큰 코노비움 수도원이다.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의 설립과 운영은 갑바도기아의 바질(Basil of Capadocia) 수도원의 규칙에 따랐다. 갑바도기아의 바질 수도원의 규칙은 코노비아적 삶과 사회 보장 제도를 우선한 것이다. 그 결과 늙고 병든 수도사, 근처 마을의 가난한 농부와 순례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에 있는 네 개 교회는 그리스어, 아르메니안어, 베시안어(Bessian)로 예배를 드렸으며, 정신 질환을 앓는 수도사들을 위해서도 포용적으로 운영했다.

 

▲ 마르 사바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다. 여자 손님들을 위한 집. 수도원 밖에 있다     © 기독타임스


사바스(Sabas)는439년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살이 되어 사바스는 유대 광야에서 수도사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유티미우스에 의해 수도원에 받아들여졌지만 너무 어린 탓에 데옥티스투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사바스는 광야를 전전한 후에478년, 기드론 골짜기의 가파른 절벽, 작은 동굴에 정착했다. 이후 많은 은둔자들이 사바스에게 모여들었다. 사바스는 광야 수도 생활의5년이 거의 끝날 무렵에 자신이 머물던 작은 동굴에 라우라를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대 라우라(Great Laura)로 알려진 지금의 마르 사바 수도원을 말한다. 시릴에 따르면 사바스의 대 라우라는 이후 팔레스틴의 모든 라우라의 대표 수도원이 되었다. 사바스는 스스로 깊은 유대 광야에서 은둔자로 살았고, 채리톤과 유티미우스에 의해 발달된 라우라적 정신을 유지하였다. 사바스는 유대 광야 수도원 운동의 중요한 선구자였다.

 

비록 데오도시우스 수도원과 사바스 수도원은 서로 분리되었지만 코노비아적 수도원과 라우라적 수도원의 관계는 그들의 지도 아래 가장 번성했고, 그들의 사후에도 이들 수도원들은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 성 사바 경당     © 기독타임스


사바스는 많은 건물을 세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바스는10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 중의8개는 유대 광야에 있다. 사바스의 수도원들을 기록한 시릴의 기록을 참고하면, 483년 대 라우라(the Great Laura), 507년 네아 라우라(the Nea Laura), 510년 헵타스토모스(the Laura of Heptastomos), 492년 카스텔리온(coenobia of Castellion), 스펠라이온(Spelaion), 509년 스콜라리우스(Scholarius), 511년 자누스(Zannus), 그리고 예레미야 라우라(laura of Jeremias)는 사바스가 사망하기1년 전인531년에 세워졌다. 사바스의 광야 수도원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드고아의 남쪽에 위치한 네아 라우라를 제외한 다른 수도원들은 모두 기드론 골짜기의 대 라우라 근처에 세워졌다.

 

사바스의 강한 리더십에 반대도 적지 않았다. 그에게 속한 일부 수도사들은 사바스의 리더십에 저항하여507년, 다른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532년 사바스가 사망하자 네아 라우라의 오리겐파 수도사들과 대 라우라의 수도사들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의 쟁점은3세기 교회 교부인 오리겐의 신학 때문이었다. 결국 유대 광야의 수도사들은 둘로 분열되었고 이 싸움은553년 유스티니안 황제가 오리겐을 유죄로 판결하기까지20년 넘게 계속되었다.

 

오리겐주의자들로 인해 유대 광야의 수도원 운동을 많이 약화되었다. 사바스의 사망 이후 유대 광야에 새로운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요단 평야의 상황은 달랐다. 모스쿠스(Moschus)는 시릴이 언급하지 않은 여리고와 요단강 주변의7개 수도원들을 기록하였다. 이 수도원들의 일부는6세기에 설립되었다. 요단 평야에 수도원들이 확장된 이유는, 비잔틴 시대에 요단강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 성 사바 경당내부     © 기독타임스


비잔틴 시대에 성지 순례자들이 증가하므로 요단 평야에 이어 예루살렘과 요단강을 잇는 유대 광야의 고대 도로에 여러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각 수도원에 속한4개의 기념 교회들도 이 고대의 도로에 세워졌다. 일반 교회와는 다르게 기념교회는 정기적인 예배를 위한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념하거나, 특별한 믿음의 사람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를 말한다. 이런 기념교회는 순례자들의 주요 순례 코스가 되었다. 이런 기념교회에는 순례자들을 섬기는 수도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숙소가 기념교회 근처에 세워졌다.

 

가장 유명한 기념교회는 요단 강변의 세례 요한을 기념한 교회이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아타나시우스 황제는 이곳에 세례 요한의 기념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 길을 걷는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은 이미 이 도로 위에 위치한 수도원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많은 순례자들로 인해 이 도로 상에 위치한 성 조지 수도원(코지바 수도원)은5세기 말에 라우라에서 코노비움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코지바 수도원은 일반 순례자들의 방문은 물론, 여자 순례자들에게도 수도원을 개방하였다. 이것은 수도원이 개인의 경건과 함께 순례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 제라시무스 수도원의 내부 전경     © 기독타임스



유대 광야와 요단 평야의 수도원 운동은61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614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628년까지14년간 교회와 수도원들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약탈되었다. 그러다628년 비잔틴 제국이 다시 팔레스틴을 점령하므로 수도원들의 일부가 회복되었지만, 638년 팔레스틴은 다시금 모슬렘에 의해 점령되므로 수도원 운동은 급격히 몰락하였다. 모슬렘 시대가 시작된 팔레스틴에서 비잔틴 제국에 속한 수도원들은 고립되었고 성지 순례자들의 발길은 거의 끊어졌다. 그리고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서서히 교회의 역사에서 잊혀졌다. 겨우 몇 개의 수도원(마르 사바 수도원, 채리톤의 수카 수도원) 만이 중세까지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고고학적으로 유대 광야의 거의 모든 수도원들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점령으로 쇠퇴되었다.

 

그러나19세기,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유대 광야의 몇 수도원들이 회복되었다. 여기에는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한 마르 사바 수도원으로 알려진 대 라우라(the Great Laura), 데오도시우스 수도원, 코지바(성 조지 수도원), 두카 수도원(시험산 수도원), 요단 평야의 제라시무스 수도원, 요단강 근처의 세례 요한 수도원과 러시아 정교회가 회복한 채리톤 수도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런 수도원들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수도원의 규칙에 따라 방문도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유대 광야의 수도원 운동은 로마의 박해 시대에 살아남은 순교자적 신앙을 가진 순례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기 수도사들의 경건과 영성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투철한 신앙이 특징이다. 그래서 초기 수도사들의 경건과 영성은 극단적인 금욕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광야에서 / 이주섭 목사

 

정리 / 신춘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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